규제 대상에서 정치 권력으로 — 암호화폐가 워싱턴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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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대상에서 정치 권력으로 — 암호화폐가 워싱턴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 FTX 붕괴로 "이대로 퇴출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에 몰렸던 암호화폐 산업이, 불과 4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정치 세력 중 하나로 올라섰습니다.

과거에는 워싱턴이 암호화폐를 규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암호화폐가 워싱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극적인 반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2026년 현재 가장 뜨거운 현장인 텍사스 선거가 무엇을 보여주는지, 데이터 중심으로 쉽고 자세하게 짚어드리겠습니다.

1. FTX 붕괴 직후, 업계는 절벽 끝에 서 있었습니다
2022년 FTX 파산 직후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암울했습니다.

의회에서는 거센 비난이 쏟아졌고, 언론은 "암호화폐는 결국 사기 아니냐"는 프레임을 씌웠습니다. 게리 겐슬러가 이끌던 증권거래위원회, 즉 SEC는 이를 대규모 단속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SEC는 2023년 한 해에만 암호화폐 관련 집행 조치를 46건이나 발표했습니다. 코인베이스, 바이낸스, 리플을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했고, 대부분의 디지털 자산을 주식이나 채권과 똑같이 감독받아야 하는 "미등록 증권"으로 취급하려 했습니다.

업계 입장에서는 시장 전체가 정부 감독 아래 정리될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압박 속에서 업계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규제의 결과는 결국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것, 그래서 규제를 바꾸려면 정치인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코인베이스, 리플, 그리고 벤처캐피털 안드리센 호로위츠(a16z) 같은 핵심 플레이어들이 정치 자금 투입을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2. 가장 강력한 무기, '페어셰이크'의 등장
업계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정치 무기가 바로 슈퍼 PAC '페어셰이크(Fairshake)'입니다.

여기서 슈퍼 PAC이란, 후보에게 직접 돈을 주는 대신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광고에 무제한으로 돈을 쓸 수 있는 미국식 정치자금 조직을 말합니다.

페어셰이크의 구조는 영리합니다. 중심에 있는 페어셰이크는 정당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그 아래 두 개의 계열사가 각 진영을 맡습니다. 민주당 후보는 '진보 보호(Protect Progress)'가, 공화당 후보는 '미국 일자리 수호(Defend American Jobs)'가 지원하는 방식입니다.

전략은 단순합니다. 친암호화폐 의원은 지원하고, 반대하는 의원은 공격하되, 정당은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 "암호화폐에 우호적인가"입니다.

어느 한 정당에만 줄을 서면 그 정당이 졌을 때 함께 무너집니다. 반면 양쪽 모두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면, 누가 이기든 우호 세력을 남길 수 있습니다. 페어셰이크의 초당파 전략은 바로 이 계산에서 나왔습니다.

3. 2024년, 전략은 성공을 증명했습니다
2024년 선거에서 결과가 나왔습니다.

페어셰이크와 계열사들은 하원·상원 선거 58곳에 걸쳐 약 1억 3,100만 달러에서 1억 3,900만 달러를 쏟아부었습니다. 우리 돈으로 1,800억 원이 훌쩍 넘는 규모입니다.

성과는 놀라웠습니다. 이 네트워크가 지원한 후보의 약 85%가 당선됐습니다. 특히 뉴욕에서는 민주당 후보 6명 전원을 지원해 모두 당선시켰고, 여기에만 530만 달러를 썼습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오하이오 상원 선거입니다. 당시 상원 은행위원회 위원장이자 암호화폐에 비판적이던 셰러드 브라운 의원을 상대로, 업계는 4,000만 달러 넘는 돈을 그의 경쟁자 버니 모레노에게 투입했고, 결국 모레노가 승리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광고들의 상당수가 정작 암호화폐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현직 의원의 다른 약점을 파고드는 인신공격성 광고가 많았습니다.

정치권이 받은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암호화폐 업계를 적으로 돌리면 선거에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4. 2025년, SEC가 방향을 완전히 틀었습니다
선거가 끝나자 정책이 빠르게 따라왔습니다.

SEC는 2025년 들어 극적인 전환을 시작합니다. 2025년 2월 코인베이스에 대한 민사 소송을 재소송이 불가능한 형태로 기각했고, 같은 달 로빈후드의 암호화폐 사업에 대한 조사도 혐의 없이 종결했습니다. 이어 5월에는 바이낸스 소송마저 취하했습니다.

수년간 법정 다툼을 벌이던 리플은 5,000만 달러를 내고, 에스크로에 묶여 있던 7,500만 달러는 돌려받는 선에서 합의를 마무리했습니다.

조직의 수장도 바뀌었습니다. 2025년 4월, 암호화폐에 우호적인 인사로 평가받는 폴 앳킨스가 새 SEC 위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새 지도부는 이전의 "소송 우선" 기조를 공식적으로 내려놓고, "소송보다 규칙 제정"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2025년 7월, 업계가 여러 회기에 걸쳐 로비해 온 'GENIUS 법안'이 제정됐습니다. 미국 최초의 연방 차원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입니다. 이 법으로 USDC를 비롯한 주요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 금융 인프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5. 2026년 실탄, 약 1억 9,300만 달러
2026년 중간선거를 향한 준비 규모는 더 커졌습니다.

2026년 1월 기준, 페어셰이크 네트워크는 약 1억 9,300만 달러의 실탄을 확보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여기에는 코인베이스가 2025년에 낸 2,500만 달러, 그리고 리플과 a16z가 하반기에 추가로 보탠 4,900만 달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2억 2,000만 달러까지 거론하지만, 가장 신뢰도 높은 최신 집계는 약 1억 9,300만 달러이고, 암호화폐 관련 정치 단체 전체로 넓혀도 2억 달러에 근접하는 수준입니다.

이 정도면 석유 업계, 제약 업계, 월가 금융권의 정치 자금에 버금가는 규모입니다. 한때 기존 금융 권력의 "대안"을 자처했던 업계가, 이제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워싱턴을 상대하고 있는 셈입니다.

6. 2026년 텍사스, 가장 생생한 현장입니다
2026년 들어 그 힘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텍사스입니다. 다만 두 선거는 결을 나눠서 봐야 합니다.

먼저 텍사스 18선거구입니다. 5월 26일 민주당 결선투표에서 크리스천 메네피 의원이 약 4만 9,000표 중 69.4%를 얻어, 22년 경력의 앨 그린 의원을 꺾었습니다. 페어셰이크 계열 '진보 보호'가 이 선거에 개입한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이 대결의 본질은 단순한 "응징전"이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으로 텍사스 공화당이 선거구를 다시 그리면서, 그린 의원의 기존 9선거구 유권자 일부가 18선거구로 편입됐고, 그 결과 두 현역 의원이 한 자리를 두고 맞붙는 보기 드문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78세 그린과 38세 메네피의 대결은 정책 차이보다 세대교체와 스타일 논쟁이 더 큰 변수였습니다. 암호화폐 자금은 그 위에 얹힌 한 요인이었습니다.

다음은 더 주목받은 텍사스 상원 공화당 결선입니다. 켄 팩스턴 주 법무장관이 현역 존 코닌 상원의원을 약 64% 대 36%, 28%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이겼습니다. 코닌은 텍사스 공화당 상원의원 중 처음으로 재선 지명에서 탈락한 인물이 됐습니다.

여기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변수는 암호화폐 자금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였습니다. 트럼프는 결선 7일 전 팩스턴을 공식 지지했고, 이는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본 현역을 끌어내리려는 트럼프의 일련의 행보 중 하나였습니다.

테더가 지원하고 전직 백악관 암호화폐 고문 보 하인즈가 이끄는 '펠로우십 PAC'이 팩스턴 지원에 175만 달러를 신고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 금액은 연방선거관리위원회 신고 기준일 뿐, 실제 집행되지 않았다는 보도와 지원을 중단했다는 보도가 함께 나왔습니다. 따라서 "암호화폐가 코닌의 30년 독주를 끝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트럼프 지지가 결정타였고 암호화폐도 승자 편에 섰다"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분명한 흐름도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만 암호화폐 관련 PAC들이 텍사스 의회 후보에게 쓴 돈은 이미 250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024년 한 해 전체 지출이 100만 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가파른 증가입니다. 그것도 본선 지출은 시작도 하기 전입니다.

7. 비판의 목소리도 함께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려도 큽니다.

맥신 워터스, 브래드 셔먼 등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2024년 초 이후 SEC가 기각하거나 종결한 암호화폐 관련 소송이 최소 12건에 이른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이 종결 건수와 업계의 정치 자금 지출 사이에 "우려스러운 상관관계"가 있다고 비판합니다.

전직 SEC 집행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증거가 상당히 강력했던 사건들까지 한꺼번에 정리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지적이 공개적으로 나왔습니다.

반면 업계의 반론도 일리는 있습니다. 겐슬러 시대의 단속 자체가 처음부터 과도하고 정치적이었으며, 지금은 그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든, "지금 규칙을 누가, 누구의 이익을 위해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8. 투자자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마지막으로 투자 관점에서 정리하겠습니다.

2026년 현재 암호화폐 시장을 움직이는 변수는 기술, ETF 자금 흐름, 기관 매수만이 아닙니다. 여기에 '정치권 장악력'이라는 변수가 분명하게 추가됐습니다.

2022년 "암호화폐를 없애야 한다"던 분위기는, 2026년 "누가 더 빨리 암호화폐 법안을 통과시키느냐"를 겨루는 경쟁으로 바뀌었습니다.

빅테크나 월가가 걸어온 길과 닮았지만, 그 속도가 비교할 수 없이 빠르다는 점이 이번 사례의 특징입니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FTX 붕괴 이후 암호화폐 업계는 규제 대상에서 미국 정치의 핵심 후원 세력으로 변신했고, 2026년 현재 워싱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권력 중 하나는 비트코인이 아니라 '암호화폐 정치 자금'이라는 것입니다.

이 콘텐츠는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특정 자산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모든 투자의 최종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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